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에 대해 알아보자
김대건은 누굴까?
김대건은 조선 최초의 가톨릭 사제입니다. 안드레아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마카오에서 유학하며 신학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마카오에서 유학하며 사제로 성사를 받고, 귀국했으나 1년밖에 천도를 하지 못하고 붙잡혀 사망한 인물입니다.
그는 왜 유명할까?
그는 조선 최초의 신부로 영어, 스페인어, 라틴어, 중국어, 프랑스어의 5개 국어를 구사 가능한 이었고,
죽음에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담대한 인물입니다. 조선 최초의 신부이자 엘리트였던 신부를 기리기 위해
이 김대건 신부의 조각상을 한진섭 조각가가 2023년 1월부터 9월까지 약 8개월간 작업했으며
2023년 9월 16일, 교황이 거주하는 성지인 바티칸에 김대건 신부의 성상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조선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는 바티칸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조선후기 시대상 천주교가 탄압받은 이유
첫 번째로, 천주교는 모든 이가 평등하다고 했기에 조선의 신분제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조선의 유교식 장례인 제사를 하지 않고 신주(조상 이름을 적은 나무조각)를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선교사들이 일반인들에게도 천주교를 전도하기 때문입니다.
+황사영의 백서 작성으로 더욱 예민해진 조선 정부
실제로 조선은 황사영의 백서로 더욱더 천주교를 박해하는 강도를 강하게 하였는데요,
이 백서의 내용은 서양의 군대를 이용해 천주교를 박해하지 말게 협박을 하자는 내용이었고,
더군다나 청나라의 군대를 이용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만들겠다는 내용 또한 있어 조선이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황사영의 광신도적인 믿음으로 인한 행동이 조선 조정에게 두려움을 주자
이는 박해가 더 심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이후로 미국의 군함을 불태운 제너럴 셔먼호라는 배를 불태운 사건과 이로 인한 침공인 신미양요까지 겹치면서
더욱더 조선 조정은 방어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협상 의지가 있긴 했다
사실 조선은 김대건의 이러한 재능으로 천주교를 버린다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김대건은 끝까지 버텼고, 프랑스가 협상을 요청하면 명분이 생기면서 김대건을 살릴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일방적인 통보만을 하자 다시 한번 설득을 시도해 보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김대건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참수를 당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인과 연락한 것은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건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시오.
여담
조선 입장에서 보면 천주교 교인들의 태연한 죽음과
믿음이 두려웠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종교의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던 조선에서는 정말 충격적이었을 것만 같군요.
저는 천주교는 아니지만
바티칸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세워진 것을 보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